미국이 국제기구 66곳에서 한꺼번에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순간, 가장 곤란한 자리에 놓인 쪽은 EU 즉, 유럽입니다. 미국은 선택할 수 있지만, 유럽은 선택을 미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유럽은 다자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해왔고, 미국은 그 질서의 최대 후원자였습니다. 이제 후원자가 빠지려 할 때, 유럽은 그 자리를 대신할지, 아니면 질서 자체를 줄일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유엔 예산과 인도주의 기구 상당 부분은 미국 분담금을 전제로 설계돼 왔습니다. 미국이 빠지면 공백은 숫자로 바로 드러납니다. 그 부담은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이동합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북유럽 국가들이 더 내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줄어듭니다.
하지만 유럽도 여유롭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지원, 국방비 증액, 에너지 전환까지 동시에 감당하고 있습니다. ‘다자주의를 지키려면 더 내야 한다’는 명제는 이제 정치적으로도 쉽지 않은 선택이 됐습니다.
외교적으로도 딜레마가 깊어집니다. 기후, 보건, 인권 같은 의제에서 유럽은 미국과 함께 규칙을 만들던 위치에 있었습니다. 미국이 한 발 물러나면, 유럽은 협상을 계속 끌고 가야 합니다. 때로는 중국과도 테이블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는 가치의 문제라기보다 현실의 문제입니다. 협상이 멈추면 규칙은 다른 방식으로 정해집니다. 유럽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입니다.
안보는 더 복잡합니다. 유럽은 미국 없는 나토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그 사실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
그래서 유럽은 다자기구에서는 미국의 공백을 메우려 하면서도, 안보에서는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책임을 떠안고, 다른 쪽에서는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이중 부담입니다.
결국 질문은 단순해집니다. 유럽은 다자주의를 말로만 지킬 것인지, 비용을 치르고 유지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를 대신해 떠안는 길도 있고, 범위를 줄여 핵심만 지키는 길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대가는 따릅니다. 다만 결정을 미루는 선택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빠진 자리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웁니다. 유럽이 그 역할을 할지, 아니면 규칙이 바뀐 뒤 적응하는 쪽을 택할지. 지금 유럽 앞에 놓인 선택지는 그만큼 분명합니다.